
Tulsa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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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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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lsakor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비록 우리의 혼과 육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심령에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님이 내주하시게 됩니다(요일 4:15). 그러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렇게 성령님이 내주해 계시는데도 우리의 혼과 육은 여전히 옛날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잘 믿는데 왜 삶이 바뀌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전심으로 신앙생활 하고, 열심히 충성하고, 더 헌신하지만 늘 뭔가 부족한 것 같고 삶이 온전치 못하다고 느낍니다.
그 일이 일어났더라도 실제 우리의 삶이나 육신에 어떤 변화도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변화는 자신의 육적 혼적 지각으로는 알 수 없으며, 그 영의 인도함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자기 행위와 노력으로 변화된 것만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重生)한 삶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심령 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의 영과 생명이 우리의 혼과 육에 풀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기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지 않고, 자신이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성령님이 계시는 것 같고, 또 죄를 짓고 잘못하면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것조차 느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이 사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죄악 충만이라 죄의 법을 섬겨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그 후 우리의 삶은 대개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보다 더 불편합니다. 늘 부대끼고 투쟁하는 삶을 삽니다. 내 자아의 육신의 소욕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3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내 육신이 나를 사로잡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나쁜 짓을 할 것 같으면 내 안에 성령님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느끼게 되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계속 불편합니다.
이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아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슬러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래서 내 속이 계속 부대끼는 것이 로마서 7장의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고(롬 8:2)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롬 8:13)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 8:9).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마땅히 그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혼과 육이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과 통치함을 받고 순종하여 삶이 변화되느냐, 즉 우리 안에 오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과 육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빚으시도록 우리 자신을 얼마나 내드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4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세례 후에도 성령체험을 통해서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 알고 싶어요 성령님, 손기철
† 말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요한일서 4장15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갈라디아서 5장17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로마서 7장23~25절
† 기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지만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성령님,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에 찾아오셔서 당신을 더 알아가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지금 당신을 사로잡는 가장 큰 육신의 소욕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통치하시도록 나 자신을 얼마나 내드리고 계십니까?
순종과 신뢰는 아버지가 요구하는 그 시간, 그 시점에서 내가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구별된 삶"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큰 그림"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의 "작은 그림"을 살펴보고, 온갖 불신앙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붙드는 것이다
인생의 광야를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과 씨름할 때 그 분은 당신을 변화시키신다.
주님과 친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것입니다.
그분은 절망의 어두움을 깨뜨리실 희망의 빛이시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더 이상 두려워하며 사는 삶은 그만 사십시오.
예수님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 소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하나?
형통한 삶은 하나님과 함께 그분이 주신 꿈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보기에는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형통한 삶이다.
십자가 지고 못 박혀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텐데..예수님은 공평하지 못한 억울한 재판 속에서도 묵묵히 따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는데.. 우린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는 커녕 입만 열면 불평, 불만을 쏟아내지는 않는지.. 십자가에 박혔다면,
우리 입 열지 말고, 하나님 입이 되어,
주님의 뜻 이루는데 힘씁시다.
좋은 신앙이란, 사람끼리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분명히 알고 그 진리 안에 들어간 신앙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배워야 하고, 말씀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반응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반응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시작하신다.
어려울 때, 고독할 때, 눈물이 날 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가 하나님과의 추억을 쌓을 시간이다. 그때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토해내야 한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고 믿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하나님을 내가 신뢰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으로 나의 모든 것을 빚어주시기 원하는 그 결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여러분이 이렇게 결단할 때,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에 뛰어들 때는 가장 먼저 “나를 창조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기억하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고 성경 말씀을 많이 안다고 반드시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둘째, 종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빌 2:7-8)
셋째,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대기실"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내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가장 좋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신앙은 중심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중심에 따라 마인드가 바뀐다. 중심이 틀어지면 다 틀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어려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방향을 맞춰야 한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깨끗한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먼저 쓰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는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
“왜 이런 비극이 저한테 일어나야만 합니까? 왜요? 제가 그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제가 그동안 고생하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부족하셨나요? 제가 예수를 믿으면 옛날의 삶과는 뭔가 다를 줄 알고 있었단 말예요.”
하나님께서는 ‘왜 네가 아니어야만 하느냐? 왜 너만은 고통에서 면제되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음으로써 그녀에게 답을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는 언어는 성경말씀 이다.
우리는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시험해서 분별할 수 있게 된다.
◈ 예배와 성찬
주의 식탁(the Lord’s table)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에서 이 사건을 기술하면서 사용하는 네 가지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각의 용어는 각기 다른 통찰을 제시한다.
첫째, 사도행전 2장 42절은 주의 만찬을 가리켜 ‘떡을 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떡을 떼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세 차례 나타나신 것과 관련이 있다고 이해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그들과 함께 드셨다.
이러한 경험 가운데 하나가 누가복음 24장 13-35절에 나온다.
예수님이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가고 계시는데 해가 저물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 “우리와 함께 유하시이다”라고 말했다.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은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셨다”(30절).
두 제자는 나중에 다른 신자들에게 이야기했으며 그때야 그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35절).
예수님은 떡을 떼는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특별하게 임재하셨다.
따라서 ‘떡을 떼다’라는 용어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함께하시는 임재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개신교인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고 말한다.
이 용어는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에서 사용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26장 17-29절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위해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강조하신다.
따라서 주의 만찬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떡을 뗀다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인식되고 그분의 부활이 확인되기 때문에 기쁨을 주는 반면, 주의 만찬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엄숙해지게 한다.
셋째,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 나타나며 개신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성찬’(Communion)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때로 ‘참예함’(participation)이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우리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신비를 말한다.
성찬은 지적인 것에 불과한 게 아니다.
우리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 안에 들어가며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넷째, 고린도전서 14장 6절에 나타나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헬라어로 ‘감사’(thanksgiving)를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식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주의 식탁에 둘러앉을 때 감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식탁에서 드리는 감사는 역사적으로 ‘큰 감사’(the great thanksgiving)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창조, 더 나아가 구속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성찬)의 의미를 생각할 때 네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의 임재, 엄숙함을 낳는 그분의 죽음,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신비에 참여함, 우리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가운데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그것이다.
신약에서 주의 식탁의 의미에 관한 통찰을 제시하는 또 다른 단어로는 ‘기념’이 있다.
목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할 때 그는 누가복음 22장 19절과 고린도전서 11장 24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식탁’은 주의 만찬, 성찬, 떡을 뗌, 유카리스트 등 무엇이라고 불리든 간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극도로 중요한 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주의 식탁을 자주 기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특히 여기에서 하나님의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을 통해, 하나님의 치유와 위로와 공급하심이 이루어진다.
나는 항상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나 힘들 때, 절망이나 슬픔을 느낄 때마다 주의 식탁을 통해 그리스도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나는 학생들이 찾아와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주의 식탁으로 피하게.
성찬의 자리로 나가 그리스도의 보살핌을 받게.”
그러면 학생들은 하나같이 다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말씀하신 대로 했어요.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셨어요.
주님이 그분의 식탁에서 우리를 보살펴주셨어요.”
- 로버트 웨버, 기독교 교양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는 의식인 세례를 통해 사람들을 예배 공동체에 참여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독교 성례인 성찬은 그리스도의 가정을 유지하는 식탁이요 양식이며 영양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다 빠져나올 때까지 결코 변하지 않는 초자연적인 평온함을 주신다.
우리가 갖는 모든 평화의 토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만 발견할 수 있다.
*주님, 어쩌자고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어려운 시험을 주십니까?
고난이 올 때 도망을 가거나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왜 이 고난이 왔는지 여쭈어보는 자세, 계시의 하나님이 기도 가운데 문제의 핵심을 알려주시면 그것을 갖고 직면의 자리에 나아가는 자세, 자신이 쌓아 올린 벽을 허물라는 계시에 곧 순종하고 무릎을 꿇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얼마나 아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만큼 그것에 순종하는 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의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의 권위와 뜻에 순복 하는 청지기로 살아가는 믿음이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면, 지금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내 안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것을 묵상하기 시작하면, 나의 마음에 회개하고자 하는 동기가 생깁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중심 가치를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기도를 통해 이런저런 작은 목적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도 자체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목사님, 지금 저 사람에게 창피를 당하고 오는 길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가르침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제가 전도지에 있는 것을 읽으면서 복음을 설명해주었더니, 그가 ‘너는 네가 확신하는 그 내용을 외우지도 않고 어떻게 나에게 선포하는 거지? 네 말을 신뢰할 수 없어서 더 이상 못 듣겠다’라고 하더니 가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까닭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과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을 모든 행동의 핵심적인 동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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